
베시는 림사 로민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항구와 가까운 언덕 위의 흰 집에서 창문 너머로 바다를 내려다보면 돛대가 숱하게 늘어서 있고,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양친은 둘 다 선박 무역에 종사했다. 해상 조달업에 몸을 담고 도시의 여러 상인 길드와 손을 맞잡은 두 사람 덕에 베시는 어릴 적부터 세상에 풍요와 여유가 있다는 걸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웠다. 짠 기를 담은 바닷바람은 집 안까지 스며들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새 옷과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안에서 베시는 세상이란 본래 즐겁고 밝은 곳이라 믿었다.
그녀의 열세 살 여름, 바다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출항한, 맑은 하늘에 순풍이 부는 날이었다. 목적지는 며칠 거리의 섬, 평소에도 일상적으로 자주 오가던 항로였다. 누구도 그 배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상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는 순식간에 모든 걸 삼켰다. 예보에 없던 폭풍이 닥쳤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다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돌아온 것은 나무조각 몇 개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잦아든 뒤의 고요 속에서 베시는 처음으로 바다가 싫어졌다.
베시는 울지 않았다. 대신 며칠 동안 항구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들의 뱃고동이 멀리서 울렸다. 파도는 여전히 들이쳤고 바람은 여전히 짰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베시는 더 이상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유산으로 충분히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길은 아니었다. 십여 년 동안 지내던 집은 팔아버리고, 돈의 절반으로 무기와 장비를 샀다. 그리고 남은 절반으로는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집 안의 고요를 견디기 어려웠고, 더 이상 오래된 기억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새것만 좋아한다는 한 마디는 장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다짐에 가까웠다. 낡은 것, 오래된 것, 변하지 않는 것들은 결국 자신을 삼킨다는 걸 어린 나이에 배웠으니까.
베시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일거리를 구했고, 힘을 썼고, 때로는 주먹을 쓰기도 했다. 넓은 바다는 여전히 잔혹했지만, 때로는 뜻밖의 것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무엇이든 삼키고, 다시 내놓았다. 사람도 그러했다. 가까워졌다가 금세 흩어졌다. 그녀는 사람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월이 지난 뒤, 베시는 다시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다. 바다는 매일 변화무쌍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바다였다. 그것이 좋았다. 매일 다르고 매일 변하지만 결국 그대로인 것.
항구는 늘 시끄러웠다.
소금기와 기름 냄새, 선원들의 고함,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림사 로민사의 오후는 언제나 그랬다. 베시는 더운 바람 속에서 땀을 훔치며 시장 골목을 뛰어서 지났다. 전날 밤 일당 대신 받아온 잡다한 것들을 팔러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싸움이었다. 아마도 해적이랍시고 남아 있던 이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모험가와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몇 명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의 빛을 전부 빨아들이는 듯한 새까만 피부에 여러 번 기워 붙인 듯한 무구를 걸친 그는 맨손이었다. 갑옷도, 무기도 없이 그저 붕대를 감은 맨손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놀랍게도 밀리지 않았다. 손으로 상대의 팔을 잡아 비틀고 몸을 낮춰 상대의 중심을 빼앗았다. 싸움이 끝날 무렵, 그는 한쪽 손을 털어냈다. 붕대 너머로 피가 배어나온 것이 보였다.
베시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 손으로 주먹질은 좀 무리 아니에요?"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너머로 황금빛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베시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였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손이 저한테 남은 유일한 무기라서요."
베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보통은 '괜찮아요' 나 '이 정도쯤이야' 같은 농담이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는 붕대를 다시 감으며 미소를 띄웠다.
"무기를 쓰면 힘 조절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그냥 손으로 싸워요. 아프긴 한데, 그게 좋아요.“
"좋아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묘하게 애교스럽게 말끝을 길게 늘이는 말투는 다른 비에라들보다 확연히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듯도 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거짓이 섞인 말투로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베시는 그를 잠시 바라봤다. 낡은 옷, 손때 묻은 장비, 닳아 해진 가죽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게 깨끗했다. 오래된 건 맞지만, 부서지진 않았다. 세심하게 손질된 흔적이 있었다.
"......가방, 꼼꼼하네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없으면 불안해서요. 정리된 게 하나라도 있어야 마음이 놓이거든요."
"저는 반대예요. 낡은 건 질색이에요."
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새로운 게 좋은 건 알죠. 하지만 오래된 것도 나름의 힘이 있는 법! 버티는 힘이라던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마음속을 묘하게 찔렀다. 베시는 늘 새것을 찾았다. 새 옷, 새 사람, 새 시작. 늘 막연히 새것만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자신이 새것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낡고 부서진 손으로 세상을 견디는 이 이상한 사람은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궁금했다. 그녀답지 않게 잠시 간 말을 고르는 동안 그가 붕대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잠깐만요, 손은 괜찮아요?"
"괜찮아질 거예요. 손은 늘 다시 붙으니까요."
참으로 자신만만한 대답이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바람이 불었다. 소금기 섞인 냄새의 말미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오래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 앞의 거리는 늘 그랬듯 시끄러웠다. 림사 로민사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인데다 요리사 길드까지 함께 있으니 요리를 맛보려는 이들부터 배우려는 이들까지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배를 정박시킨 선원들과 해상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 관광객, 술 취한 모험가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엉켜드는 오후였다. 그 틈에서 발렌타인 케이크는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손 끝에 닿는 것은 100길 남짓한 동전 몇 닢. 그는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스튜인가, 아니면 구운 생선인가.'
배가 속에서부터 꼬르륵 울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글자를 읽다 말고 웃었다.
"음...... 고기 쪽이 낫겠지.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니까~!"
메뉴판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케이크를 누군가 뒤에서 불러세웠다.
"저기요!"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연한 분홍빛을 띄는 밀색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전날 물에 빠진 돌고래 주점에서 취객을 제압하다가 마주친 여자였다. 그녀는 여전히 활기찼다. 바닷바람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완연한 미소가 긴 인사를 대신했다.
"이 근처에 있었구나. 혼자 밥 먹게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하게 비스마르크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더니,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같이 먹어요, 제가 살게요.' 하고 웃어 보이더니 얼른 앉으라는 듯 그를 바라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는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비스마르크 안은 시끌벅적했다. 바닷바람에 구운 고기와 맥주, 버터와 빵의 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넣었다.
"스튜 하나, 생선 구운 것 하나, 큰뿔염소 스테이크 하나, 그리고 빵 좀 더 주세요. 디저트는 나중에."
그는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이 정도의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시키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니, 그는 그녀가 어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활기찬 모험가보다 훨씬 먼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주문한 음식의 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 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솔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실 돈이......"
"알아요."
그녀가 여전히 예의 그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그를 업신여기거나 놀리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한층 또렷이 드러나는 미소였다.
"한참 고민했잖아요, 딱 하나만 고르려고. 그러고 있다가는 저녁 때까지 앞에 서 있을 것 같았어요."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따스한 기운이 있었다. 케이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들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스튜와 육즙을 잘 가둬 구운 큰뿔염소 스테이크, 껍질이 바삭하게 익은 생선 구이와 버터 내음이 아찔한 부드러운 빵. 그의 지금까지의 여정 중 몇 번 본 적 없는 정갈한 식탁이었다.
그의 앞에 앉은 여자는 놀랄 만큼 잘 먹었다. 스튜를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더니 금세 먹어치웠다. 케이크는 그녀를 조용히 따라 먹었다. 부드러운 크림이 들어간 스튜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점점 더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었다. 생선 구이는 입 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고, 큰뿔염소 스테이크는 그가 지금까지 먹어 본 고기 요리 중에 최고였다. 달콤하고 고소한 버터 향기가 가득한 빵은 그녀가 먹는 것을 보고 어설프게 손으로 떼어 먹었다. 결대로 찢어진 빵이 혀 끝에서 녹는 것만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
"......발렌타인 케이크예요. 당신은요?"
"귀여운 이름이네요. 난 베시. 그냥 베시라고 불러요."
케이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우연히 먹어 본 달콤하고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를 제 이름 삼았던 것 뿐인데, 눈앞의 이 여자는 자신에게는 특별한 것들이 너무도 익숙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듣고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손, 아직 아파요?"
베시가 갑작스레 물었다. 바닷바람에 절여진 채로 굳어가는 붕대를 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이제 익숙해졌으니까~!"
"흉터가 많을수록 실력도 늘죠?"
그는 그녀의 물음에 잠시간 고민했다. 흉터는 실력이라기보다는 기억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폭력을 절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흉터는 그의 업보들을 기억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그가 한참을 생각하자 베시는 더 캐묻는 대신 숟가락을 돌리며 턱을 괴고 웃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케이크가 물었다.
"근데, 왜 사 줬어요?"
"그냥요. 싸움은 잘 하는데 먹는 건 못하는 것 같아서."
그는 피식 웃었다.
"맞아요. 저 이런 요리는 처음 먹어 봤거든요."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난간 너머로 바다가 반짝였다. 베시는 남은 빵 조각을 집어들며 물었다.
"더 먹을 수 있어요?"
케이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딜 가나 덩치로는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열량이 필요했고, 뭐든지 힘을 내기 위해서라면 먹어 치웠다. 무일푼으로 유랑하던 시절엔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항상 먹는 것이 부족했던 그에게 오늘의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순수한 호의로 마음마저 채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베시가 기다렸다는 듯 종업원을 불렀다.
"생크림 케이크, 딸기 올라간 걸로 한 조각이랑 레몬 커드 케이크 하나, 커피 두 잔도 같이 주세요."
"두 조각?"
"하나는 내 거예요. 나도 단 거 좋아하거든요."
두 사람은 정말로 케이크 두 조각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쓴 커피는 익숙해지기 어려웠지만, 혀를 감싸는 폭신한 시트와 달콤한 생크림의 감촉은 그를 순식간에 기분 좋게 만들었다. 크림이 묻은 포크를 내려놓고 나란히 숨을 고를 때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배불러요."
"저도요."
그는 천천히 배를 두드렸고, 그녀는 그 옆에서 따라 했다. 밖으로 나오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을 같은 방향으로 비추고 있었다. 소금기 섞인 오후의 공기가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로 다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어쩐지 다음 만남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항구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축축했다. 안개가 부두 아래로 엉겨붙어 있었고, 바닷물에 젖은 널빤지에서는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출항을 준비하는 배들은 닻줄을 감아 올리며 쇳소리를 내고 갈매기들은 그 위를 낮게 스치며 꽥꽥댔다. 발렌타인 케이크는 그 소리를 모두 듣고 있다는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손은 다시 붕대로 감겨 있었고, 어깨에는 낡은 가죽 가방이 하나 달랑 매달려 있었다. 여정을 떠날 준비를 마쳤음에도 그는 선착장 끝에서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니 걱정하는 사람처럼. 그의 시선은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계속 흔들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제 몸만한 도끼를 짊어진 그림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베시였다.
"정말 갈 거예요?"
그의 질문은 벌써 네 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베시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지었다.
"가야죠. 준비 다 됐어요."
"준비는 늘 다 돼 있죠. 문제는...... 그게 진짜 괜찮은 준비냐는 거예요."
안전하고 익숙한 도시에서 계속 살아온 그녀가 갑자기 짐을 싸는 모습은 그의 눈에 위험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떠도는 자' 라는 자각이 있었다. 고향이 없고, 정박할 곳도 없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조차 없는 삶이 익숙했다.
그것은 때론 외로웠고, 때론 슬프기도 했다. 배가 고팠고, 몸이 아프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들개 같은 삶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던 그가 지금처럼 단단해지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생에 누군가를 감히 끼워넣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이 도시의 향이 마음에 들었다. 갓 구운 빵 냄새, 생선 비린내, 젖은 밧줄의 냄새까지. 이 모든 것이 '정착한 사람들의 냄새'처럼 여겨졌고, 베시는 그런 공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가 발 딛고 선 곳은 항상 떠내려가는 쪽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땅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로 그 차이가 그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한참 말을 골랐다. 상처를 주거나 매몰차게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케이크는 한참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때론 다쳐요. 무서울 때도 있고, 먹을 게 없을 때도 많아요."
그녀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생각보다 훨씬 힘들 겁니다."
"그럴수록 재밌겠죠."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걱정하는 건 알아요. 괜찮아요, 케이크 씨."
"아뇨, 안 괜찮아요."
그는 단호했다.
"당신은 이 도시 사람이고, 이제 갈 곳은 당신이 가 본 적 없는 곳이고, 나는......"
"나는 이제 바다 사람이 될 거예요."
베시의 말에 케이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항구 도시에 살아온 그녀가 바다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바다 사람이라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베시는 시선을 돌려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곱씹듯 말을 이었다.
"평생 항해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대요. 그 사람들은 너무 오래 바다를 떠돈 나머지 나중엔 땅을 밟으면 땅에서 멀미를 한다고 하죠."
그녀의 시선이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거요. 언젠가 정착하게 되더라도 그게 꼭 림사 로민사여야 할 필요는 없겠죠."
케이크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망설였다.
"돌아올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파트는 남겨두는 게 낫지 않나요?"
베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몇 개쯤의 닻을 걸어두고 살아요. 저를 림사 로민사에 묶어둔 닻은 엄마와 아빠였구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엔...... 그 닻이 빠졌어요. 그래서 이 도시가 저를 붙잡지 못하더라고요."
그녀는 손바닥을 펴서 바람결에 흔들었다.
"이제는 돛을 펴고 바람이 부는 대로 가 볼래요."
베시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케이크는 그 눈빛에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자신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는 그 눈빛을 잠시간, 아니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정말, 나중에 후회 안 할 거예요?"
"글쎄요."
베시는 나직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쾌활하게 웃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웃음소리.
"그건 나중에 가 봐야 알죠."
그는 마지막까지 버텨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꾸만 걱정이 피어올랐다. 림사 로민사는 아늑하고 따뜻한 도시였다. 그런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가 자신과 함께 떠난다는 것은 어떤 잘못된 선택, 혹은 착각이 아닐까.
"베시, 사실 나도....... 내 신원은 불분명해요. 어디서 왔는지, 누굴 닮았는지도 모르겠고. 당신은......."
"에오르제아 삼국을 오가는 허가증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정도면 꽤 신원 보장된 사람 아닌가요?"
"그건......뭐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베시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금 미소지었다. 순간 그는 그녀가 태양빛을 반사하듯 빛난다는 착각이 들었다. 해무가 걷히고 해가 떠오르자 그녀의 눈이 햇볕과 바닷빛이 섞인 것처럼 반짝였다. 케이크는 그것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결심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가라앉아 있었다가 이제야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떠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 사실 앞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녀의 발걸음을 갑작스레 바꾼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이미 정해 둔 길을 우연히 함께 걷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이크 씨."
"네......"
"당신이 이렇게 성가실 정도로 걱정하는 모습...... 좀 믿음직해요."
그녀는 코를 찡그리며 웃어 보이고는 배가 떠나겠다며 갑판과 부두 사이에 대충 걸쳐 놓은 판자를 익숙하게 밟고 올랐다. 그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가요, 하고 속삭였다.
케이크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붕대 감긴 손으로 그것을 맞잡았다. 온기가 옮아오는 듯 했다. 놓칠까 두려워 으스러질 듯 움켜쥘 필요도 없었고, 깨질까 조심스레 잡을 필요도 없었다. 정확히 '함께 떠나는 것' 에 어울리는 힘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여정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은 곳 어딘가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떠돌며 익힌 모든 경계심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매듭 하나를 간신히 풀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요."
그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내딛었다. 바람이 불고 부두 아래서 파도가 부서졌다. 닻줄이 끊어지는 소리는 없었지만 어쩐지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묶여 있던 닻 하나가 그 순간 조용히 물 속으로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미지로 향하는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두려움 대신 어떠한 설렘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람 냄새가 달라졌다.
언제나 맡아오던 림사 로민사의 바람이 오늘따라 가벼웠다. 마치 이 도시가 나를 더 이상 붙잡을 생각이 없다는 듯, 바다 쪽으로만 밀어내고 있었다. 바다는 원래 그런 곳이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지고 잡으려 하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나는 그런 바다를 참 좋아했다.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고, 모양이 매일 달라지는데도.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변하지 않는 건 결국 언젠가 무너지고 없어지니 차라리 계속 바뀌는 쪽이 더 낫다고 믿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새까만 덩치를 보고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케이크 씨가 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그는 떠도는 사람이고, 그의 눈에 나는 이곳에 정착한 사람이니까. 모르는 땅을 밟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정착한 이들이 떠나는 데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도.
사실 모르는 건 아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때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 곳이다. 떠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면 꽤나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떠오르는 건 아쉬움이 아닌 시원함이었다.
이 도시를 붙잡던 닻은 엄마와 아빠였다. 돌아올 이유가 있었고, 정박할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사라지고 나니 이 도시가 더 이상은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고 안락하지만 그저 '여기 있던 곳' 일 뿐, 나를 묶어둘 힘이 없는 장소.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음의 한켠에서는 이미 돛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후회, 그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지금의 나는 이 선택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돛을 접을 이유가 있나.
그 손은 상처투성이에 굳은살로 가득했고, 매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그 손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세상을 맨손으로 버틴 사람의 손이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손이 아니라 함께 어디론가 가자고 이끄는 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가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분다.
나는 돛을 펴기로 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