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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의 기억

사스타샤 침식 동굴이라는 이름이 처음 입에 올랐을 때, 그것은 아직 하나의 지명에 불과했다. 림사 로민사의 항구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위험하다는 소문과 해적들이 여자들을 잡아간다는 이야기 정도가 덧붙여진 장소. 발렌타인 케이크와 베시는 그것을 두 사람이 정식으로 맡은 첫 임무라는 사실로만 받아들였다. 마물과 해적을 정리하는 간단한 소탕 임무 정도로 설명되는 일이었고, 특별하거나 영광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으나 그 순간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지도 위에 표시된 붉은 선은 동굴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케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받아들였지만, 설명이 끝난 뒤에도 잠시 지도를 짚은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다와 맞닿아 침식된 동굴, 밀려드는 물과 어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마물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해적, 제거 대상. 그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말들이었지만, 그의 몸은 그 단어들에 쉽게 순응하지 않았다.

동굴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짠내와 습기가 공기 속에 섞여 들었다. 베시는 거침없이 걸어나갔고, 케이크 역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서로에게 긴장을 전염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케이크는 무의식적으로 붕대를 감은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베시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굴 안의 공기는 바깥과 완전히 달랐다. 이 동굴의 어둠은 빛마저 삼켜버리는 듯했고, 머리 위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와 발소리는 물기 머금은 돌벽에 부딪혀 기묘하게 울렸다. 처음 마주친 것은 마물이었고, 그것은 익숙한 싸움이었다. 케이크의 주먹은 정확했고, 베시의 도끼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물의 외피가 찢어지고 거친 포효가 터져 나오는 동안에는 아직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공기의 결이 바뀌듯 싸움의 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 무기를 들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뱉는 소리는 마물의 것이 아니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고, 분노였고, 공포였다. 케이크는 첫 타격을 주기 직전, 아주 짧게 멈췄다. 눈이 흔들리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이 닿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건 죽여도 되는 적인가? 대답이 나오기 전,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 인간의 몸이 꺾이며 내는 둔탁한 타격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마물의 외피가 찢어질 때보다 훨씬 선명하게 상대의 살아 있는 감각을 느꼈다. 움츠러드는 근육, 떨리는 숨, 그리고 터져 나오는 단말마의 신음. 그것은 과거에 그가 보았고 겪었던 폭력의 기억과 정확히 겹쳐졌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멈추고 말았다.

"케이크!!"

그것은 찰나였지만 전투에서는 치명적인 틈이었다. 해적의 반격이 날아왔고, 베시가 그를 밀쳐내며 그 사이를 메웠다. 도끼날이 번쩍였으나 상대가 좀 더 빨랐다. 검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고, 베시는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둘러 상대를 베어냈다. 해적이 치명상을 입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베시는 얼굴에 튄 핏자국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옷자락을 끌어올려 어깨를 덮었다. 그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케이크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명백히 굳어 있었다. 눈동자가 떨리고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다리까지 떨고 있었다. 분노도, 투지도 아닌 무언가에 붙잡힌 얼굴이었다.

싸움은 계속됐다. 멈출 수 없었다. 케이크는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생각이 끈적하고 불쾌하게 따라붙었다. 그는 자신의 단전부터 목구멍까지 굳은 피가 채운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반쯤 죽여 놓는 것은 언제나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무력화와 살해의 경계는 이곳에서 너무 쉽게 무너졌다. 인간을 죽을 때까지, 되돌릴 수 없이 때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만드는 결과를 너무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국 싸웠다. 자신이 멈추면 전투는 길어지고 그 길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케이크, 정신차려요!"

"베, 베시, 나,나는......."

"지금 멈추면 안 돼요!"

베시는 그를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밀어 세우고 정신을 차리라고 일갈했다. 지금 멈추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 말은 위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때로는 몰아붙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단단했다. 

'모든 건 살아 나간 뒤에 생각하자. 그 다음에야 흔들릴 수 있어.'

베시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 동굴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시는 가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지만, 시선은 곧 케이크에게로 향했다. 그는 손을 씻으려다 말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피와 물이 섞여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는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을 떼어내지 못한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베시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깨달았다. 이 사람은 마물보다 인간과 싸우는 것을 훨씬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그가 지켜온 어떤 윤리의 형태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부순 뒤 혼란스러워하는 중이라는 것을. 베시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도끼를 닦고,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도는 규칙적으로 부서졌고, 햇빛은 물결 위에서 산란하며 반짝였다. 어둠과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동굴 안과 달리 바깥의 공기는 지나치게 맑았고, 그 대비가 오히려 숨을 막히게 했다. 케이크는 몇 걸음 정도를 비틀거리며 걷다가 이내 힘없이 멈춰 섰다. 넓은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베시는 그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가 말을 걸거나 손을 얹는 것보다 그가 혼자 서 있을 시간을 허락하는 쪽이 낫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케이크의 등은 단단해 보였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웃어 넘길 것만 같던 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서 울고 있다는 사실이 그 등을 더욱 크게 보이게 했다. 베시는 그 등이 커다랗고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베시는 그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투 중에는 보지 못했던 떨림이 어깨를 타고 내려왔고, 주먹을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크게 소리내어 울고 싶은 것을 삼키듯 간헐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베시는 그제야 조용히 숨을 내쉬고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모래 위를 밟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그의 정적을 방해하기라도 할까, 의식적으로 발을 살살 내딛었다.

느린 발걸음으로 마침내 그의 옆에 섰을 때도 베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살짝 굽혀 그의 눈 앞에 서서 얼굴을 가린 손을 부드럽게 걷어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이 무너질 자리를 만들어 주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케이크는 처음엔 저항하듯 몸을 굳혔지만, 이내 힘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래가 피와 땀에 섞여 옷자락에 달라붙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베시는 물통을 꺼냈다. 차가운 물이 붕대 감긴 손 위로 흘러내리자 케이크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고 붉어진 눈으로 베시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입술만 움직였을 뿐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베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도, 울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천천히 물을 부었다.

피와 먼지가 씻겨 내려가며 손의 윤곽이 다시 드러났다. 굳은살과 상처, 오래된 흉터 위로 새로운 상처가 겹쳐져 있었다. 베시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유리 조각을 다루는 것 같았다. 케이크는 그 과정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하던 숨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는 것을 베시는 느꼈다.

붕대를 풀자 해진 천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베시는 새 붕대를 꺼내 손바닥부터 차분히 감아 내려갔다. 손목을 두 바퀴 돌고, 다시 손등으로 올라가며 매듭을 지었다. 그 동안에도 케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앉았고, 몸을 지탱하고 있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는 법을 이제야 떠올린 사람처럼 보였다. 붕대를 다 감고 나서야 베시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용히 말했다.

"이제 됐어요."

그 말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케이크는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아주 낮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베시는 그의 옆에 그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고, 그 소리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참 뒤, 케이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베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케이크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음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동작에 가까웠다. 베시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여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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