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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kkicake

새로운 항로를 향해

눈은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았다. 커르다스의 계절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그저 오래 불던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용머리 전진기지의 하늘은 드물게 맑은 얼굴을 하고 반짝이는 눈 결정이 흩날렸다. 그곳에 오래 살았던 이들은 그 현상을 다이아몬드 더스트라고 불렀다. 새로운 길을 앞두고 있을 때의 공기였다. 무언가가 끝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다음이 시작되기 직전의 공백이었다. 케이크는 그 공백을 견디는 데 익숙했지만 이번에 그가 마주한 공백은 유독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짐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더 늘릴 것도, 덜어낼 것도 없었다. 익숙한 무게의 장비와 낡은 외투, 몇 번을 다시 접어도 모양이 바뀌지 않는 지도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점검한 뒤에도 한동안 방을 떠나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쳤으나 몸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시선이 자꾸만 방 안을 맴돌았고, 그 끝에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

베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바깥을 보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한다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보내는 태도였다. 커르다스에 와서 처음 보았던 경계와 긴장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 시간이 가져다 준 여유와 익숙함이 몸에 남아 있었다.

"곧 출발이죠?"

베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내뱉는 말이었다. 케이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녀가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응, 해가 기울기 전에."

"그럼 지금이 마지막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일까요?"

그 말은 가볍게 던진 것처럼 들렸으나 케이크의 마음 속 어딘가를 쿡 찌른 것만 같았다. 그는 괜찮은 대답을 찾으려다 실패했고, 대신 방 안의 사소한 것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벌었다. 장갑을 다시 접고, 필요 없는 매듭을 몇 번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을 멈추면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베시는 그가 가까이 오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케이크는 아주 사소한 일에 걸려 넘어지듯 말을 잇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시선이었다. 전우로서, 동료로서, 늘 지나치던 눈맞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시선이 닿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게 되었다.

"응?"

베시의 짧은 물음에는 걱정이나 의심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그를 확인하는 말이었다. 케이크는 그 짧은 한 음절이 더 어려웠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결국 솔직한 쪽을 골랐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르겠어요."

그 대답이 완전한 거짓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 문제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베시는 그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은 갈 곳을 잃고 그 자신의 가슴께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채도 낮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었다.

"그럼 나가요.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요."

베시가 문 쪽으로 향하는 순간, 케이크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늦게 따라 나섰다. 늘 그랬던 거리였는데 오늘따라 그 반 박자 늦은 거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는 베시의 등 뒤를 괜히 오래 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잡을 이유도, 잡아야 할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온 동작이었다.

일곱 구름 여관 밖으로 걸어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이슈가르드의 공기였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정신이 또렷하고 명료해지는 겨울의 냄새였다. 베시는 목을 움츠리며 외투를 여몄고, 케이크는 무의식적으로 그녀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가 스스로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고 멈췄다. 

"베시~. ......춥지는 않아요?"

"응, 이 정도면요."

베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손을 소매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그의 외투를 꽤나 줄였는데도 소매가 조금은 길었는지 손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소매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그 손을 너무 오래 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시선을 거두었다. 왜 그런 걸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그 작은 동작 하나는 그의 시야에 꽤나 오래 머물렀고, 케이크는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날씨인지, 그녀의 상태인지, 아니면 그가 지금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어색함이 아직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인지. 베시는 그의 말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단정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천천히 그를 못 본 체 하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고, 평소 같은 동행이었다. 그런데도 케이크는 자꾸만 발걸음을 의식했다. 속도를 맞추는 데 집중했고 괜히 앞서거나 뒤쳐지지 않으려 애썼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해왔을 일들이 하나하나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문득 깨달았다. 베시 앞에서만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베시의 앞에만 서면 때때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순간이 어긋났고, 심장은 이유 없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전투 전의 긴장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앞에 적이 있을 때도 느낀 적 없던 감각이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마다 몸 안쪽에서 번져 나왔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려웠다.

"케이크."

베시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엷은 미소를 띄웠다. 평소처럼 아무 의미를 덧붙이지 않았을, 그저 호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으,응."

"조금 긴장한 것 같아서."

베시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을 이미 한 번쯤 느낀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드물게 푸른 이슈가르드의 하늘이 그녀의 눈에 비쳐 반짝였다. 살을 에는 추위에 붉게 상기된 뺨과 입술 같은 것들이 자꾸만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장난처럼 던진 말에도 케이크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결국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응, 조금."

베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그에게 굳이 이유를 묻거나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그 점이 케이크를 더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억누르기에는 자꾸만 고개를 들었고, 드러내기에는 아직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맑은 하늘 저 멀리 그들이 떠나온 전진기지가 보였다. 용시전쟁을 마친 지금은 이제 이슈가르드를 떠날 시간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어정쩡한 상태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주 잠깐 아쉬워졌다. 그 아쉬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베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또다시 우리가 모르는 길이네요."

케이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또다시 자신의 양 손을 마주잡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베시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이유를 묻지 않은 채였다. 케이크는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선명해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그는 이제 이 사람 앞에서 이전처럼 편안해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어렴풋이 알았다. 이 감정에는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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