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의 언어
커르다스의 하늘은 베시가 난생 처음 보는 빛깔을 하고 있었다. 끝없이 무채색으로 펼쳐진 구름 아래, 날마다 피부를 찢듯 부는 바람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베시는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곳의 추위는 림사 로민사에 찾아오는 겨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베시는 저마다 추위를 견뎌내는 방식이 다르고, 눈의 언어 역시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낯선 땅, 낯선 억양 속에서 알아가고 있었다.
성도 외곽, 설풍이 칼처럼 몰아치는 병참 기지ㅡ낯선 이들은 그곳을 "용머리 전진기지" 라고 불렀다ㅡ 베시는 케이크와 함께 그곳에서 머물렀다. 병사들의 숙소와는 구분된 작은 방, 창문은 얼어붙어 열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잉걸불이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방. 그리고 몇몇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그들은 케이크에게 화색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했고, 노골적인 경계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케이크는 친절에 어색해하다가도 경계심을 보이는 이에게는 오히려 저자세로 다가갔고, 그는 이 설원에서 누구보다 낯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내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베시는 자신이 이 낯선 세계에서 '누구의 사람' 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낯선 이들이 그녀를 경계하거나 의심치 않는 것은 아마도 그의 비호 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베시는 의도적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본래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았으나 소리없는 관찰은 마물 따위를 처치하고 돌아오는 임무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생존의 기술이기도 했다. 병사들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으며 그 안에는 기묘한 허세와 애처로운 낙관이 뒤섞여 있었다.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지난한 전쟁 속에서 누군가는 영광을 꿈꿨고, 또 누군가는 그 꿈이 다른 이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베시는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녀는 타인을 대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고, 짧은 대화 몇 마디조차 없이도 타인의 긴장을 쉬이 읽어냈다. 때로는 함성 뒤에 숨겨진 두려움마저 알아볼 수 있었다.
림사 로민사의 햇살 아래 모두에게 각인된 존재였던 때와 달리 그녀는 이제 이름 없는 존재처럼 '얹혀' 살고 있었다. 전장의 대열에 끼지 않았고 군마를 타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한 발 뒤에서 타인들을 바라보았다. 훈련장 너머에서 울리는 검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 전령이 들고 오는 사상자 명단을 받아드는 손과 목례, 새벽녘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병사의 뒷모습.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이제 이질적인 것들을 익숙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케이크는 그녀를 보호했지만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도 드물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독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안정한 온기로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밤에는 말없이 남긴 사과 하나가 진심 같았고, 어떤 새벽엔 그가 끌어올려 덮어 준 망토의 무게가 대답 같았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것. 베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때로 사과했고, 때로는 불안해했다. 아마도 베시가 자신과 함께 떠나는 바람에 이런 일을 겪게 되었음을 계속 마음속 어딘가에 묻어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베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함께 림사 로민사를 떠난 것을 여전히 후회하지 않았다. 본래 항해라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고 때론 목숨을 잃거나 영구히 불구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커르다스로 도망친 것도 그런 일의 연장이었기에 베시는 아쉽거나 슬플지언정 케이크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한 배를 탄 사이가 아니던가.
다만 이 낯선 세계는 사람들 사이를 어떠한 선으로 나누려 했다. 적과 아군, 상급자와 하급자, 피난민과 주민, 정교와 이단. 그 세계에서 베시는 어느 곳에도 정확히 속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 경계받으면서도 경계받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감추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새로운 삶을 관찰하며 스스로를 적응시킬 뿐이었다. 이름을 묻는 이에게는 웃으며 넘겼고, 과거를 말하라 재촉하는 자에게는 고개 숙여 사과하거나 뭉뚱그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뿐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말을 삼키고 시선을 나누는 법,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언어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방인으로, 낯선 곳에서 그저 살고 있었다. 숨을 쉬고 깨어나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익숙하지 않은 세상은 그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사이에서 작고 단단한 자리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저 '살아 있는 것' 이 그녀에겐 이미 충분히 낯설고도 귀한 일이었다. 이곳의 삶에 굳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베시는 병사들의 일과를 익혔고, 그들 사이의 질서와 암묵적인 규칙들을 파악해나갔다. 용머리 전진기지에는 무겁게 얼어붙은 공기가 항상 감돌았다. 무거운 갑옷과 차가운 언어가 몸에 배어 있는 이들은 침묵보다는 명령을 나누는 데 익숙했고, 감정은 검의 날에 묻어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녀는 가끔 작은 일손을 도왔다. 병사들이 사용한 식기를 씻는 것을 돕거나 붕대를 정리하고, 이따금 물을 길어오기도 했다. 말은 거의 없었고 다가서는 일도 없이 그저 가벼운 목례가 그들의 소통의 전부였다. 하지만 베시는 그들이 피로와 허기, 공포를 어떻게 견디는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가끔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농담과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빛 너머로 각자의 감정을, 사연을 짐작했다. 어떤 이는 걱정했고, 어떤 이는 자신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하듯 먼 곳을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모든 것은 말하지 않아도 흐름 속에 드러났다. 그리고 삶은 날씨와 같아서 오래 지켜보면 흐름이 읽혔다.
그러나 베시의 시선이 가장 자주 머무는 곳은 늘 하나였다. 발렌타인 케이크. 병사들 사이에서 그 이름은 두려움의 상징이자 그들의 세계보다 더 위 어딘가에 속한 자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어딘가로 사라져 며칠이 지나 피 냄새를 안고 돌아왔다. 마주칠 때마다 그의 눈은 점점 불안정해졌고, 그의 걸음에는 때로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몇몇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고 그 또한 그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베시는 그와 자신이 이곳에서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케이크가 굳이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녀의 시선이 유독 그를 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수프가 담긴 잔을 건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고, 그저 시선이 교차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베시는 그 황금빛 눈에서 무언가를 읽고야 말았다. 슬픔과 상실, 불안 같은 것들이었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의 교류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쓰러진 병사를 대신 부축해 옮기거나 비가 새는 천막을 함께 덧대기도 했다. 강풍에 불이 꺼진 아궁이에 잉걸불을 넣어 다시 불을 피우기도 했고, 무기를 함께 닦기도 했다. 다정함이나 따뜻함이라기보다는 그저 잠깐의 공존에 가까웠으나 베시는 그 잠깐의 온기만으로도 그가 무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끔찍한 일들이 지나고 낯선 곳에 있음에도 자신을 밀어내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아주 어렴풋이 그의 시선 역시 베시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
케이크의 시선은 아주 가끔, 드물게, 하지만 길게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입술은 항상 다물려 있었다. 베시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말보다 솔직한 온기와 거리, 기울어진 어깨 너머의 무게. 베시는 그의 고요를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나 불안 따위의 것들을 감추려 했지만 베시는 그것이 그저 숨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도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미지에 발을 디디고 있는 중이고, 그것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숙제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밤, 베시는 우연히 그가 침상에서 웅크려 떠는 것을 보았다. 그간 자신을 몰아붙인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기어코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순간이었다. 크게만 느껴지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베시는 그를 구태여 위로하거나 달래려 들지 않았다. 단지 오래도록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다 한 손으로 천천히 그의 축축한 눈가를 닦아냈다. 케이크는 속에 얹힌 것들을 게워내듯 흐느꼈다. 베시는 순간 그의 눈빛이 궁지에 몰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내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불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한참을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곁에 누워 있었다.
그 후로 케이크는 말없이 그녀의 쪽으로 자리를 틀어 눕는 일이 잦아졌다. 살갗을 닿이거나 숨소리를 섞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으나 둘 사이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온기 섞인 공기가 흘렀다. 그의 눈빛은 때로 깊이와 무게가 달라졌다. 어느 날은 소년처럼 맑았다가, 또 어떤 날은 안개처럼 침잠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시는 알고 있었다. 상처를 숨기려는 이들은 때로 그 상처를 알아봐주는 이 앞에서 가장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조심스러움이야말로 누군가를 향한 처음의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낯선 땅, 억양, 감정들 속에서 베시는 조용히 그에게 물들기 시작했다.
새벽녘, 용머리 전진기지는 유난히 조용했다. 교대가 끝난 뒤 남은 불빛들은 하나둘 꺼졌고, 눈은 잠시 숨을 고르듯 잦아들어 있었다. 그 틈에서 베시는 우연히 병사 하나가 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투구를 조심스레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벽에 기대 세워 둔 그 등은 단정했다. 고개가 깊게 숙여져 있어 입술이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세만으로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베시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또렷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신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 땅의 정교도,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도 아직은 그녀에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대신 그녀는 케이크가 언제나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어떤 냄새와 상처를 안고 있든 그가 이곳으로 다시 걸어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 그것은 소망이나 간청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되어 왔다는 경험에 가까웠다. 믿음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미미한 감정이었고, 기도라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감각이었다.
그 날 밤, 케이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희미한 피 냄새가 났고, 숨결에는 차가운 공기가 섞여 있었다. 폐 속까지 얼어붙은 듯했다. 그는 말없이 작은 가방을 내려두고 조심스레 외투를 벗었다. 베시는 그를 바라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설명도 위로도 필요하지 않은 정적이 놓였다. 케이크는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고, 베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늘 그렇듯이 곁을 확인한 뒤 앞을 보는 눈이었다.
불은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바깥에서는 다시 비수처럼 살을 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베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서로를 아직 잃지 않았음이 감사했다. 그녀는 기도하지 않았고, 대신 어떤 확신을 가슴 깊숙이 묻은 채 잠에 들었다.
2. 어떤 신앙
커르다스의 눈은 피를 씻어주지 않았다. 케이크는 임무에서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손을 씻고 나서야 그 사실을 인식했다. 눈에 한참이나 손을 처박은 채로 멍하니 서 있다 들어온 뒤에도 붉은 기운은 손에서 가시지 않았고, 눈에 엉겨붙은 듯 보이던 핏자국도 바람이 불면 얼어붙은 채로 흩어질 뿐이었다. 물은 차가웠고 손은 쉽게 감각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때릴 때의 저항과 뼈가 맞부딪히던 순간의 울림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힘이 풀리며 몸이 무너질 때의 무게까지, 그 기억을 지나치게 정확히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그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점이 더 그랬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상태로 그는 다음 움직임을 계산했다.
임무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루를 넘어 돌아오기도 했고, 이틀을 넘기고서야 다시 용머리 전진기지의 성문을 통과한 날도 있었다. 돌아오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얼어붙은 장비를 몸에서 떼어내고, 무릎을 꿇고, 붕대를 갈았다. 인간과 용의 피 냄새는 아무리 몸을 씻어내도 가시지 않았고 추위는 불가에 앉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이 이상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감각, 불을 다시 붙일 수 있다는 확신. 그 안정감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누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고, 그들 대부분은 케이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러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를 짓눌렀다.
왜 항상 나는 돌아오는가.
어떤 질문은 분노로도, 자책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채 그의 안쪽에 가라앉아 묵직하게 남았다.
그에게 맡겨지는 역할은 점점 명확하고 잔인하리만큼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평범한 병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 실패를 전제로 하지 않는 자리는 당연하게 그에게 돌아왔다. 발렌타인 케이크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병사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이미 '인간'의 기준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물러설 때도 그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했고, 그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마주하는 이들의 시선은 존경과 경계 사이 어딘가에서 머물렀고, 그는 그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점점 익혀 갔다. 다가가거나 밀어내지 않는, 그 사이 어딘가의 애매한 위치,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케이크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평소보다 느리고 이상하리만큼 안정적이었다. 심장은 점점 느리게 뛰었고, 사람을 '처리' 할 때 으레 떨리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간이라면 느껴야 할 감각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것을 상실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무언가를 느끼는 '범위' 가 달라지고 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범위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이크는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앞에 서려 했다.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과 돌아와야 한다는 책임이 동시에 그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투에 임하기 전, 그는 항상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숨이 막히는 순간이나 죽음을 직감한 찰나도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가장 또렷한 시간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귀를 채우는 낯선 소리들이 잦아들고, 주먹에 실리는 힘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느껴지면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 때 케이크는 자신이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은 용기나 각오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이미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그 확신의 근원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그것을 차곡차곡 마음 한구석에 쌓아두었다.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이유,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인간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들을 하나씩 분류했다. 새벽의 동료들, 등을 맡길 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가 도망친 뒷모습을 지켜 주었던 이들, 그리고 베시.
베시의 얼굴은 구체적인 장면으로 떠오르기보다 하나의 기준점처럼 그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거나 흩어지지 않는 위치, 설명 없이도 걷다 보면 도착하는 어떤 좌표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감정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정의내렸다. 감정을 담는 순간, 그 기준이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크는 그것을 보이는 대로 믿기로 했다. 믿음은 편리했다. 질문을 요구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믿음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는 자신이 무너질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려 이겨내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차이는 미묘했지만 쉬이 건너갈 수 없는 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자는 감정이었으며, 후자는 구조(structure)였다. 케이크는 그가 갑작스레 겪은 불합리들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결국 자신의 삶을 어떤 구조 위에 올려두고자 했다. 구조는 감정처럼 배신하지 않고, 필요할 때 기능했다.
그리고 베시는 그 구조의 한 부분이 되었다. 가장 단단한 부분, 가장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둥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잔인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감 있는 선택처럼 느꼈다. 그녀를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지지 않는 기준으로 두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감정은 언젠가 소모되지만 기준은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점점 경직되었고, 경직될수록 묘한 안도가 그를 감쌌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는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변질되고 있었다. 그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지 않게 되었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판단을 흐릴 수 있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 명명하여 정리했다. 베시를 떠올릴 때조차 그는 그녀의 목소리나 표정 같은 것보다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그 사실이 유지되는 한 그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것을 여전히 믿음이라 불렀다.
그 믿음은 케이크를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쳐 주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질문을 하나씩 잘라냈다. 그는 더 이상 '지금 나는 괜찮은가', '지금 내가 힘들지 않은가' 를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버틸 수 있는가를 계산했다. 케이크는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깎여 나가고 있는지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것이 유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곧 억누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다만 그는 이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 자신이 다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더욱 단단히 믿었다. 믿음이 신앙처럼 굳어질수록 그는 덜 흔들렸고, 덜 인간적이 되었다. 그것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판단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방식이었다.
밤은 깊어질수록 더욱 조용해졌다. 오래 전에 꺼진 전등에는 이미 온기라곤 남아 있지 않았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가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케이크는 잠들지 못한 채로 누워 있었다. 숨을 고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슴이 미세하고 불규칙으로 들썩였고, 눈을 감아도 어둠은 그를 잠의 세계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낮에 보았던 장면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 쓰러진 몸들, 흩어진 장비, 눈 위에 흩뿌려진 흔적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지 않으려 했지만 기억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끌고 가곤 했다.
그때서야 감정이 그를 비로소 따라잡았다. 분노나 슬픔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미 너무 늦은 시점에 그에게 도착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길로 향할지 선택했다고 믿어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택지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인간의 죽음에 익숙해진 자신이 낯설었고, 그 낯섦을 부정할수록 더 선명하게 현실이 그를 괴롭혔다.
케이크는 이 감정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기로 한 선택을 떠올렸다. 그의 옆에서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는 여자에게라면 특히 더 그러했다. 베시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그가 세워 둔 구조를 스스로 허무는 일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고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이 방에는 그를 붙잡아 줄 것도, 밀어낼 것도 없었다. 온전히 혼자라고 느낄 때에만 이런 생각들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자주 혼자가 되려 했다. 감정이 그를 파도처럼 덮치는 순간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었고, 통제되지 않는 것은 제거해야 할 요소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자신의 옆에 잠든 베시를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선은 예전과 달랐다. 함께 서 있는 이를 보는 눈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녀는 이 설원의 언어를 완전히 익히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고, 지난한 시간 동안 이어진 전쟁의 계산에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평범한 여행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을 잃게 될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그 길에서 떼어놓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떠올렸다.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아니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것은 딱히 잔인한 판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감 있는 선택처럼 보였다.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그녀가 자신 때문에 죽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곱씹으며 그것이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애써 밀어냈다. 베시의 의사를 묻는 순간 그는 선택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그 선택이 잘못될 경우의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말하지 않는 것이 그녀를 보호하는 길이고, 존중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다음 날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손은 익숙한 동작으로 움직여 장비를 꿰어 입었고, 마음은 이미 다음을 향해 정리되고 있었다. 곁을 확인하는 습관은 여전했지만 그 확인은 점차 형식에 가까워졌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앞에 있는 길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누가 따라올 수 없는지. 그는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함께 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것들은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이 믿음이 자신을 살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3. 선택의 기로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변화였다. 베시는 케이크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가 어느 순간부터 설명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만 그 침묵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숨을 섞어 본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예전의 침묵은 굳이 말로서 깨야 할 것이 아닌 편안한 공백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말을 꺼내는 순간 무너질 것만 같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케이크는 매번 돌아왔고 베시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로 하루를 정리했다. 그러나 매번 돌아오는 이는 점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빨리 씻었고, 더 빨리 붕대를 갈았고, 더 빨리 장비를 정리했다. 무언가를 지우듯 말이다. 피 냄새가 방 안에 퍼지는 시간이 짧아졌고, 대신 그의 안쪽 어딘가에서 막 끓어오르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베시는 그것이 분노인지, 혹은 단순한 피로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것을 누구에게도 닿지 않게 하려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외투를 벗어 벽에 걸고는 한 번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불씨를 살폈다. 베시는 수프가 담긴 잔을 들고 있었다. 손끝에는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받지 않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베시는 순간 자신이 잠시간 투명해졌다고 생각했다. 케이크가 그녀를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어떠한 공간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그의 시선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자주, 그리고 길게 머물던 그 황금빛 눈이 이제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마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가 새어 나갈까 두려워하는 사람 같았다. 베시는 그 두려움을 이해하면서도 이해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상실을 느꼈다. 멀어진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확실하게 멀어지는 것, 옆에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위치로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케이크는 잠들기 전 습관처럼 곁을 확인했다. 베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굳이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베시가 거기에 있는지, 숨이 고른지, 담요가 제대로 덮여 있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여전히 정확했고 다정한 동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시는 그 동작이 더 이상 '함께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기능하는지 점검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당연하게도 따뜻하지 않았다.
베시는 그가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마도 묻는 순간 그가 더 멀어질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움직였다. 물을 길어오고, 방을 정리하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막았다. 그 모든 일은 용머리 전진기지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케이크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방 안의 온도를 유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온도가 자신을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눈보라는 다시 거세졌다. 같은 눈이 내리고 같은 바람이 불었지만 베시는 그 안에 결이 다른 날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날은 케이크가 돌아오는 발소리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풀어졌고, 어떤 날은 그가 문을 닫는 소리 하나로 모든 것이 다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베시는 날씨가 바깥에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람의 기척, 말의 온도, 마음의 습도 같은 것들이 어딘가에서 계절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멀어지는 방식은 점점 정교해졌다. 노골적으로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필요 이상의 것을 남기지 않았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씻고, 붕대를 갈고, 장비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갈 준비를 했다. 베시는 그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인지, 아니면 그 자신을 위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그 준비가 끝날수록 케이크가 더 단단히 닫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았고, 열 수도 없었다. 억지로 여는 순간 닫힌 문은 부서질 것이고, 부서진 문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일들을 이어갔다. 그것들은 방 안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동시에 케이크가 스스로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한 의식에 가까웠다. 매번 돌아오는 케이크가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해도 적어도 돌아오는 길만큼은 끊기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 번씩, 아주 짧게 그녀의 마음에 다른 가능성이 스쳤다. 그녀가 그를 인간으로 붙들어 놓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베시는 그 가능성을 애써 덮어 두었다. 열어보는 순간 자신이 흔들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조용히 인정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지났다. 며칠 뒤, 바깥의 날씨와는 상관없이 용머리 전진기지 안에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병참을 맡은 이들이 외부인들을 분류하고 일손을 배치하고, 위험한 구역과 안전한 구역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다. 이름이 붙은 질서가 생기면 그 질서는 언제나 사람을 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베시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도 곧 누군가의 '자리' 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분류가 케이크의 선택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자리는 예상보다 단정한 형태로 그녀 앞에 당도했다. 그것은 제안이었고, 특별한 호의도, 과장된 친절도 아니었다. 병참 기지를 담당하던 이슈가르드 쪽 인물은 짧은 설명만을 덧붙였다. 용머리 전진기지에는 언제나 손이 부족하고, 외부인이라 해도 신원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으며 위험 구역으로 나가지 않는 조건이라면 머무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나가 싸우거나 그들을 이끌 필요는 없고, 보조적인 일만 맡아도 충분하다는 말도 함께였다. 그는 베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경계도 동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눈이었다.
베시는 즉답하지 않았다. 머물 수 있다는 말이 케이크와의 완전한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가능성 자체가 마음을 흔들었다. 안전한 구역, 반복되는 일상, 죽음과 맞닿지 않아도 되는 하루들. 그것은 유혹이라기보다는 오래 잊고 지내던 감각에 가까웠다.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허락되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단어를 아직 필요로 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케이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도, 우연한 소문으로도 아니었다. 베시는 그에게 직접 입을 열었다. 길지 않은 설명이었다. 그저 이런 제안이 있었고,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케이크는 그 말을 듣는 동안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놀라거나 어떻게 할지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잠깐의 침묵을 깨고 생각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요."
그 말은 명령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망설임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설득도 아니었고 감정이 실린 말도 아니었다. 그것은 판단이었다.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고, 그녀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며 자신이 가는 길에는 위험만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과장하거나 그녀의 능력을 폄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반박할 틈이 없었다. 케이크는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결론에 도달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숨이 잠시 멈췄고 귀 안쪽은 먹먹해졌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위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걷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었고, 선택을 제안받은 순간보다 선택당한 이 순간이 더 선명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베시는 입을 열지 못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미 자신의 몫까지 결정해 두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을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었으나 그 가능성은 그의 한 마디로 정리되어 버렸다. 베시는 자신이 이곳에서 누구의 사람이 되어 있었는지, 그 질문의 답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그는 그녀를 지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를 혼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서서 발 밑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입을 열면 가장 먼저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반박일지, 질문일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말일지. 그녀는 그래서 숨을 고르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나 숨은 그녀의 뜻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들이마신 공기가 가슴께에서 막히는 것만 같았다. 내쉰 숨은 끝까지 나가지 못한 채 안으로 되돌아왔다. 케이크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필요한 말을 다 했다고 믿는 사람처럼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득도, 망설임도 없는 판단이 그의 방식이었고, 그녀는 그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는 커르다스에 도착한 이후 언제나 이렇게 결정해 왔고, 그렇게 위험을 뚫고 돌아왔으며, 그 방식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베시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판단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가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그녀의 안에서 그간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렸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감정은 항상 그렇게 사소한 균열 하나에서 예고 없이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케이크를 똑바로 보지 않으면 이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은, 항상 그렇게 결정해요."
"베시."
"나한테 물어본 적은 있어요?"
"......."
"나는, ...... 나는 따라온 적 없어요. 선택한 거예요. 당신 곁에 있기로."
케이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낸 적이 없었고, 언제나 병참기지의 무너지지 않는 성벽 같은 태도로 그를 대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케이크는 베시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속으로 삼키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베시는 굵은 눈물 방울을 계속 떨구면서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런데 왜 지금은 당신이 내 몫까지 정하죠?"
말이 거칠어질수록 그녀의 울음도 깊어졌다. 단정하게 정리된 말도 아니었고, 품위도 없었다. 숨을 급히 들이켤 때마다 목이 막혔고, 목소리는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베시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려 하지 않았다. 정리하는 순간 이 감정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녀는 지금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 같았다.
"나를 한 번이라도 돌아본 적 있어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케이크는 순간 자신이 늘 곁을 확인했다고 믿어 왔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확인은 그녀가 그 자리에 있는지에 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괜찮은지,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지, 이 길을 함께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물은 적이 없었다. 묻는 순간 자신이 그녀를 붙잡는 사람이 될까 봐,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수렁으로 함께 추락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그 회피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그는 똑바로 보고 있었다.
베시는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마치 아이처럼, 자신이 우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한 채로 울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베시는 자신이 케이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케이크는 그제야 한 발 다가와 그녀 가까이에 섰다. 거의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베시는 그의 손이 닿기 전에 먼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힘을 실은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 안에는 그동안 억눌러 온 시간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울음은 더 거칠어졌고, 숨은 끊어질 듯 하다 이어졌다. 케이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 타격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닿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느낀 상처를 몸으로라도 느껴야 했다.
"당신은, ......당신은. 매번 너무 멀리 가요......."
그 말이 끝나자 베시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케이크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베시를 끌어안았다. 계산 없는 동작이었다. 판단도 책임도 그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는 동작에 가까웠다. 그러나 베시는 그 품에서 더 크게 울었다.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숨이 막힐 때까지 울었다. 그것은 케이크의 가슴 깊은 곳까지 파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말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울음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베시의 체온이 케이크의 몸에 전해졌다. 작지 않은 무게, 분명한 존재감이었다. 그는 그 온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이 사람 없이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그 질문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에 대한 답 역시 명료했다. 그는 그녀 없이 이 여행을 끝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위험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를 움직이게 했던 모든 판단과 신념들이 이 온기 앞에서는 힘을 잃고 있었다.
베시의 울음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숨은 아직 고르지 않았지만, 손은 그의 옷자락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케이크의 가슴팍에는 분명 멍이 들 것이었고, 그는 그 통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말로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밤은 길었다. 울음이 잦아들고, 숨이 고르게 돌아오고, 두 사람의 몸이 서로에게서 조금씩 분리되어도 방 안의 공기는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크는 베시를 위해 벽난로에 불씨를 더 넣었고, 베시는 옆에서 그가 데운 물을 조금씩 마셨다. 말하지 않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지만 그 시간은 마치 눈 위에 얇게 쌓이는 서리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베시는 이불을 정리한 뒤 침상으로 들어갔다. 케이크는 그 옆에서 잠시 망설이다 늦게 눕는 쪽을 택했다. 그는 항상 누군가 먼저 잠들고 난 뒤에야 눈을 감곤 했다. 그것은 경계이자 책임감이었고, 혹은 어떤 처벌처럼 굳어진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베시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고르고 있을 뿐,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울음이 남긴 흔적은 사람을 쉽게 깊은 잠으로 밀어넣지 못한다는 것을 케이크는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이불을 들췄다. 그리고 옆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돌로 만든 천장의 결이 얼룩처럼 보였다. 바깥에서는 다시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이불 속의 온기는 천천히 두 사람의 사이를 메웠다. 케이크는 가만히 누워 베시가 내쉬는 숨의 간격을 세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숨이 너무 얕아지면 다시 울음이 돌아오는 징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방식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그의 신경은 지금껏 세계를 향해 있었고, 한 사람의 무너짐은 낯선 일이었다.
베시가 조용히 몸을 뒤척이자 이불이 사각거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케이크는 그 소리에 몇 주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며 손을 잡아 주던 순간이었다. 축축한 눈가를 손끝으로 훑어 내리던 감각. 그 때, 그는 정말로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것은 눌러놓은 감정보다도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리를 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잠드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은 오늘 비로소 부서졌다. 케이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하지 않는 쪽이 아니라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베시."
그녀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아주 작게 대답했다. 응. 그 한 음절이 이상하게 그의 가슴을 조여왔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꺼낼 말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꺼내 본 적이 없었던 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안쪽에서만 관리하고 분류해 두었던 것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 내놓는 일이었다.
"몇 주 전, 당신이 내 눈물을 닦아줬을 때."
베시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흘렀다. 케이크는 그 미세한 반응을 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끌어안고 싶었어요."
그는 좀더 다정하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으려는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이 나오는 순간, 케이크는 자신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베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의 쪽으로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케이크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고 결국 몸을 돌려 베시를 향해 누웠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케이크의 포옹은 다정함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시는 처음에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곧 그의 품에 천천히 몸을 맞춰 안겨들었다. 그 온기가 케이크의 가슴에 닿는 순간, 그는 그녀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순간에 묻고 싶었던 것들이 더는 뒤로 밀려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베시가 살며시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빛나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크는 그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카락 끝과 이마 근처 어딘가를 어설프게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녀에게 흔들리고 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시선을 올려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내가 언젠가 생명에, 무게를 매겨 사람을 지금보다 더 많이 죽이게 되는 날이 와도......."
케이크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둘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심장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곁에 있어줄래요?"
베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크는 그 침묵이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이상하게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더 깊은 곳에 묻어둔 질문을 꺼내야만 했다. 그의 물음의 핵심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죽음의 양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평생 지키고자 했던 마음을 내 손으로 꺾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고백, 아니 고해처럼 들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을 피해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뒤로하고 모른 척 하고 있어요."
그는 베시를 끌어안은 팔에 아주 약하게 힘을 주었다. 무너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아니라, 그 사이의 무엇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베시, 당신은......이런 나를 믿을 수 있나요?"
그 질문을 끝으로 케이크는 더 말하지 못했다. 숨이 턱에 걸렸고, 목이 잠겨들었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베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답이 무엇이든 이제는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용기였다.
그리고 베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케이크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낮에 주먹으로 내리치던 자리와 같은 곳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자 멍이 들기 전의 통증이 아주 약하게 살아났다. 케이크는 그 통증이 이상하게도 자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이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베시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은 왼쪽 가슴 위에 얹혔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손길이 멈춘 자리에서 베시는 숨을 들이마셨다. 오래 고민한 대답이 시작되려는 기척이었다. 케이크는 그 숨소리 하나에 자신이 얼마나 간절해졌는지 깨달았다.
베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대답에 대한 망설임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꺼내기 직전의 진동에 가까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도,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울음이 다시 터지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급히 밀어내지 않았다. 숨을 내쉬는 순간에 그동안 단단히 눌러두었던 말들이 가장 먼저 흘러나왔다.
"그렇게 묻지 마세요."
베시는 먼저 나온 말을 쉬이 끝맺지 못했다. 고개를 다시 숙였고, 케이크의 옷자락에 이마가 닿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울고 있는지, 울기 직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을 떠나보내면 자신이 얼마나, 어디까지 견뎌왔는지를 설명할 기회가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목소리는 갈라졌고, 잘게 떨렸다. 그러나 케이크는 그 안에 담긴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베시는 그의 품에서 아주 조금 몸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고,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그 표정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것이었다.
"당신이 멀어질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잠시간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말을 다시 이어갔다. 케이크는 베시가 이 문장들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래 마음속에서 되뇌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베시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손이 여전히 케이크의 심장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손바닥에 아주 약하게 힘을 주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에 있었어요."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말을 증명하려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단어와 문장을 골랐다.
"내가 당신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베시는 케이크가 멋대로 규정한 생각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는지를 말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칼날처럼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녀를 상처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케이크는 베시가 자신 없이도 그녀 나름의 길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분명 고난 앞에서 등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버티는 것이 익숙하고,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어 깨끗한 등이 자랑인 사람이었다. 케이크의 부재가 그녀에게 고난이라면 그녀는 으레 이겨내고 살아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녀가 세상을 사는 태도를 너무도 쉽게, 제 멋대로 정의내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당신이 있어서 버텼어요."
그 말은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케이크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도록 방을 덥히는 것도, 당신이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불을 밝히는 것도...... 모두 내 선택이었어요."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다시 얕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소중해서 그랬어요."
그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울음이 따라왔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베시는 숨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흐느꼈다. 케이크는 그녀를 더 힘주어 안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겨우 이어 말했다.
"당신이 묻는 건......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느냐가 아니예요."
숨이 끊겼다 이어졌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버려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거잖아요."
그 말에 케이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베시는 그 미세한 떨림을 느끼고, 손으로 그의 등을 마주 안아 끌어당겼다. 그것은 놓치지 말라는 것처럼, 그리고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될 때도...... 이미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베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한 마디는 분명히 그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살아는 가겠죠. 그런데...... 그건 당신이 아는 내가 아니에요."
베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터져나오는 울음소리를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케이크는 자신의 신앙이 그녀와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04. 설풍
눈보라가 눈에 띄게 잦아드는 날이었다.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이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고 흩뿌리듯 지나갔다. 용머리 전진기지의 아침은 늘 같았지만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가벼웠다. 베시는 눈을 뜨자마자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몸이 먼저 느끼는 변화였다. 폐를 채우던 찬 공기가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지고 손끝의 감각이 늦게 얼어붙는 날, 설원이 잠시 이를 드러내지 않아 주는 날이었다.
케이크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급히 움직이지는 않는 태도였다. 장비는 정리되어 있었지만 당장 나갈 채비를 한 것은 아니었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벽난로 앞에 앉아 불씨를 살피고 있었다. 베시는 그 뒷모습에서 그와 커르다스에 도착한 뒤 느끼던 익숙한 긴장을 느끼지 못했다. 전날 밤의 울음과 언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위에 덧씌워진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무너진 뒤에 남는 잔해 같은 고요였다.
그날은 모두가 짠 듯 아무도 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병참기지는 늘 바빴고 그 바쁨은 특정한 두 사람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처음으로 아무 역할도 맡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 베시는 천천히 물을 길었고, 케이크는 그 옆에서 말없이 통을 받아 들었다. 손이 잠깐 스치는 순간, 얼어붙은 손 끝에서도 어떤 온기가 느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했다. 급히 씹어 삼키거나 서로의 그릇을 살피며 굳이 속도를 맞추지 않았다. 다만 다 먹고 난 뒤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베시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 컵을 손에 쥔 채 창문 쪽을 바라보았고, 케이크는 그녀가 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눈 덮인 성벽 너머로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에는 희망도 절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이 있었다.
밤이 되자 둘은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경계나 확인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 같았다. 케이크는 눕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베시도 숨을 죽이지 않았다. 이불 아래에서 서로의 체온이 닿았지만 그 온기를 확인하려 애쓰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고, 그 침묵은 불안하지 않았다. 감정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굳이 억누르거나 숨기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
다음 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은 다시 거칠어졌지만 두 사람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베시는 정리해야 할 나무 상자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일손을 도왔고, 케이크는 장비를 점검했다.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서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그 거리는 계산되거나 약속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의 기억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케이크는 그 사이에 자신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전처럼 신념이 무너진 자리에서 곧바로 새로운 구조를 세우려 들지 않았다. 대신 허물어진 채로 며칠을 버텼다. 버틴다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목적이 달랐다. 이전에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면 지금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베시는 그 변화를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움직임을 보았다. 손을 씻는 속도, 붕대를 감는 방식, 장비를 다루는 손의 힘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전보다 느려졌으나 대충 넘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돌아온 뒤 곧바로 다음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여백이 그녀에게는 충분하게 느껴졌다.
이틀째 밤, 케이크는 먼저 불을 더 넣었다. 베시는 침대에 앉아 그가 하는 일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불씨가 살아나는 소리, 장작이 타닥이며 자리를 잡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소리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장소리 같았다. 케이크는 그 불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베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 다시 나가야 해요."
그 말에는 변명도 결의도 없었다.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케이크는 그것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그 동안 말하지 않는 것이 보호라고 믿어 왔고, 판단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판단이 아니라 요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청은 상대의 수락을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그는 그 전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용의 둥지에 갈 겁니다."
그는 왜 위험한지, 얼마나 돌아오기 힘든지, 어떤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따위의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베시를 여전히 응시한 채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함께 가요."
그 말은 제안이었고, 동시에 초대였다. 판단도 명령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선택을 돌려주고 있었다.
베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안에서는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안전한 구역, 반복되는 일상, 죽음에서 한 걸음 물러선 자리.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더 오래 자신을 붙들어 왔던 감각. 함께 걷는다는 것, 선택해서 곁에 선다는 것. 그녀는 케이크를 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열지 않았으나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세워 둔 도끼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손을 대지 않았지만 여전히 날이 세워져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졌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들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